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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단편집23

처음이라는 말의 의미. 나는 처음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나는 그 처음, 또는 첫이라는 어감을 좋아하고. 처음에 기대어 따라오는 그 미지에 대한 기대를 좋아한다. 첫 입학. 첫 인상. 첫 사랑. 세상이 온통 처음 경험하는 것들로 가득했었던 때를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파도는 그 넘실거림이 재미있었고. 처음으로 입학한 학교는 하루하루 심심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내 첫 방학은 그렇게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나보다. 첫 연인과는 손만 잡아도 얼굴이 발갛게 익었었고, 처음으로 한 입맞춤은 머리속이 멍해지는 연분홍 맛이었다. 그렇게 첫경험들로 가득찬 내 10대와 20대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알록달록 다채로운 시간들로 가득차 있었다. 오늘은 참 바쁜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해가 졌다. 분명히 정신.. 2023. 11. 9.
위스키 “수고하셨습니다お疲れ様でした” “수고하셨어요お疲れ様です” 열심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등 뒤로 문을 닫고 거래처 사무실을 나선다. 제법 성공적인 미팅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직 자신이 없는 일본어로 진행을 한 탓에 많은 긴장을 했다. 덕분에 이 추운날씨에 내 양손은 흥건히 땀에 젖었지만 뭐 어떠랴, 지금은 그저 이 미팅이 끝났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리-상 수고하셨어요リ-さんお疲れ様です” 습한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열심히 말리고 있던 내 옆에서 한 여성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건다. 타카하시 우이高橋 羽衣 내가 다니는 회사의 일본 현지 직원. 나보다 한살인가 두살 연하로, 아직 일본시장에 익숙치 않은 나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나저나 저 놈의 리-상. 성씨로 불리는것이.. 2023. 11. 8.
식탁예절 종편에서 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아침 방송. 현란한 그렇지만 요란하지는 않은 관악기들의 연주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주부들 사이에서는 육아에 관련해서 유용한 정보로 화제가 되고 있는 방송. 생방송 ‘우리 아이 바르게 키우기’ 의 막이 올랐다. 오프닝 음악이 사그라 들어갈 때 즈음 이어져 터져 나오는 방청객들의 호응. 그에 맞춰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가 사그라들어 갈 때 즈음, 무대에 등장한 중년의 여성 패널이 공손히 인사하며 손에 쥔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댄다. "반갑습니다. 어머님들. 일주일 만에 뵙는데 어째 지난 주보다 더 젊어지신것 같아요?" 패널의 농담에 까르르- 하는 웃는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방청객들의 반응을 확인한 여성 패널, 올해로 마흔 네 살을 맞은 박해영 아나운서는 .. 2023. 7. 28.
VR 덜덜덜..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에 숨은 채, 문틈 사이로 밖을 살피는 문후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숨어 있는 곳은 그가 평소에 그렇게나 열렬히 좋아하던 유명 게임방송 여 BJ 단비의 집 장롱 안. 그리고 그가 지금 이 안에 숨어있는 이유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아무리 봐도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무섭게 생긴 2인조가 지금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따, 우리 약쟁이씨는 또 어데 쳐박혀서 뻗어있노, 오늘 수금날인거 까먹은거 아이가? 참말로 어디 가고 없는가, 행님, 어쩔까요?” “어쩌긴 뭐 어째, 큰형님 말씀 하신 대로 해야지. 이 년도 처음에나 좀 돈이 되나 싶었더니, 이제는 약을 너무 많이 쳐 먹어놔서 오히려 적자야. 오늘 수금 안되면 섬으.. 2023. 7. 3.
램프의 지니 뭐? 소원의 갯수를 무한대로 늘려달라고? 식상하군. 식상해. 그렇지만 들어줄게. 걱정하지마, 나는 램프의 지니니까. 얼마든지 들어줄게. 그래 다음 소원은 뭐야? 눈이 너무 나빠서 눈이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걱정하지마, 자 짜잔- 어때? 잘 보여? 그 눈은 네 몸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사람들 눈 중에서 크기가 제일 맞고 제일 시력이 좋은 사람의 눈이야. 그러고 보니 그 친구 트럭운전수인데 지금 막 코너 길을 돌고 있었던 거 같지만, 뭐 걱정하지마. 네가 알바는 아니니까. 그 다음 소원은 뭐야? 돈? 당장 1억정도면 되겠어? 뭐 소원의 숫자는 무한하니까. 자 짜잔- 어때? 1억이야. 지폐가 좀 쭈글쭈글한 게 많이 섞여있어도 이해해. 좀 지저분한 돈들은 어디 장롱 속이나 장판 밑에서 나온 게 많아서 그래.. 2023. 6. 27.
재수없는날 염라대왕이 말했다. “좋다, 그럼 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으로 되돌려 보내주마. 물론 그 시점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은 지울 것이기에 그냥 돌려보내 줘봐야 너는 똑같은 인생을 살테지, 그러니 그 후회되는 짓을 하지 않도록 무언가 장치를 해놓고 싶다면 그것 정도는 도와주도록 하마”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염라대왕님. 저, 정말로 이번에는 열심히 살겠습니다. 정말로 착하게 남들 도우면서-“ 염라대왕은 소란을 피며 인생의 계획을 늘어놓는 망자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렸다.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지루했을 뿐. 그랬다. 염라대왕은 지루했다. 매일같이, 아니 정확히는 시간 축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이 세계에서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이 지루했기에 잠깐 장난을 쳐 보았을 뿐,.. 2023.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