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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단편집

위스키

by 담쟁이저택 2023. 11. 8.

 


“수고하셨습니다お疲れ様でした”
“수고하셨어요お疲れ様です”

열심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등 뒤로 문을 닫고 거래처 사무실을 나선다.

제법 성공적인 미팅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직 자신이 없는 일본어로 진행을 한 탓에 많은 긴장을 했다. 
덕분에 이 추운날씨에 내 양손은 흥건히 땀에 젖었지만 뭐 어떠랴, 지금은 그저 이 미팅이 끝났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리-상 수고하셨어요リ-さんお疲れ様です”

습한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열심히 말리고 있던 내 옆에서 한 여성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건다.

타카하시 우이高橋 羽衣 
내가 다니는 회사의 일본 현지 직원.
나보다 한살인가 두살 연하로, 아직 일본시장에 익숙치 않은 나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나저나 저 놈의 리-상.
성씨로 불리는것이 익숙치 않은 나에게 리-상이라는 말은 조금 간지럽게 들린다.

“네, 우이씨도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리-상이 다 하신걸요. 일본어가 많이 늘으셨어요”
“다 우이씨 덕분입니다”

우이씨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유창한 한국말로 전환했다.
한국에서 마주친다면 과연 누가 이 사람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발음도 어조도 한국인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리-상. 배 안고프세요? 조금 늦었지만 식사라도 하러 가실래요?”

우이씨는 양손으로 아랫배를 살살 비비며 배고픔을 형상화 한다.
말하는 것을 몸으로도 표현을 하는 것. 우이씨의 버릇이다.

“아, 글쎄요.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가, 식욕이 별로 없네요. 그냥 술 생각만 간절해요”

반쯤은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우이씨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것 같다.

“저도 사실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아요. 그러면 어디 근처 바에가서 위스키 한잔 어떠세요? 신주쿠에는 좋은 바가 많아요”

위스키?

나는 위스키는 별로 마셔본적이 없다. 싫어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20 대 후반인 나에게 술이라고 하면 늘 소주나 맥주였다. 그 이외의 술은 잘 접해본 적이 없다.

“여기서 걸어서 5분도 안걸리는 곳에 제가 좋아하는 바가 있어요. 가실래요?”

고개를 갸우뚱 하며 질문을 형상화 하는 그녀에게 나는 긍정을 뜻으로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여 보였다.
간만에 온 외국이다. 현지인이 추천해주는 가게는 가지 않으면 손해겠지.

우이씨는 경쾌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사소한 이야기를 몇마디나 했을까, 이야기가 마무리 되기도 전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5분 거리라는 그녀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도착한 곳은 상가와 상가 사이에 끼인 기형적으로 좁은 건물이었다.
좌우 폭이 몇미터나 될까 싶은 그 건물은 당당하게 엘리베이터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건물 3층이에요. 앞에 간판을 보면 아시겠지만 사실 이 건물 전체가 다 바에요. 각 층이 전부 다 다른 가게인데 저는 3층에 있는 바 요루Bar 夜 가 제일 좋아요”

그녀의 말 마따나 엘리베이터 옆에적인 간판에는 각 층에 다른 상호의 바가 적혀있었다.
우이씨의 인도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3층에 도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별도의 가게 문도 없이 바로 바의 내부가 우리를 맞이했다. 열평이나 되려나 싶은 작은 공간에는 고작 의자 4개와 바텐더를 마주할수 있는 바테이블이 전부였다.

손님이 앉을 수 있는 공간보다 바텐더 뒤 술병이 차지하는 공간이 더 넓어보이는 작은 바.
그 이국적인 소박함에 나는 이 장소가 벌써부터 마음에 들었다.

“리-상. 이쪽이요”

먼저 성큼성큼 걸어들어간 우이씨는 바 테이블 맨 안쪽으로 들어가 옆의 의자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작은 체구의 그녀와는 다르게 내가 그 자리에 도착하는데는 약간씩 몸을 뒤트는 곡예가 필요했다.

“어서와요. 어떤걸로 드릴까요いらっしゃい. 何をお召し上がりですか ”

우이씨와 막역한 사이로 보이는 바텐더는 접객인사조차 간략화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의사를 먼저 확인하려는듯 내 쪽을 쳐다보는 우이씨에게 나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위스키는 잘 몰라요. 우이씨가 추천해주세요”
“아, 그러셨구나. 평소에는 어떤 술을 드세요?”
“소주나 맥주정도 인것 같아요”
“음-“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한 뒤, 바텐더에게 몇가지 위스키를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이치余市를 권해드리고 싶어요. 피트향이 강한 편에 속하는데 그게 매력이에요”
“피트요?”

피트라는 용어는 처음 들어보았다.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약간 석탄냄새같은 탄내를 말하는건데.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우이씨는 바텐더에게 요이치 두잔을 니트로 주문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니, 이 사람은 도대체 한국어가 어디까지 구사가 가능한걸까.

우이씨가 주문해준 위스키는 취향저격이었다.

마시기 전부터 코에 확 밀어닥치는 피트의 향은 머리가 얼얼할 정도였지만, 막상 혀에 닿는 순간에는 그저 순한 향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모금을 마시고 나니 다시금 그 탄내가 그리워져 위스키잔에 코를 박게 되는 희한한 순환을 불러일으켰다.

“이거 너무 맛있는데요. 완벽하게 제 취향이에요”
“그래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우이씨는 바텐더와 무어라 말을 하고 또 다른 위스키를 대령했다.
그 위스키 역시 내 취향이었던 것은 내가 위스키에 잘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이씨의 선택이 탁월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발을 담군 나는 연거푸 잔을 비워냈다.
속이 뜨끈 해지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웃음이 헤퍼졌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술을 소개해주느라 같이 따라 마신 우이씨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평소같으면 하지 않을 이야기.
조금은 짓궂은 농담.
어깨를 때린다거나 하는 가벼운 스킨쉽.

시간이 늦어가면서 우리의 취기도 점점 깊어져 갔다.

“리-상은 여자친구 있어요오-?”

어느새 알싸하게 취한 우이씨는 한손으로 턱을 괸채 약간은 꼬인 혀로 내게 묻는다.
어두운 바 조명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너무 예뻐보인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매력적으로 웃을수 있는걸까.

“아니요, 없어요. 우이씨는요? 남자친구 있어요?”
“글쎼요오- 있을것 같아요 아니면 없을것 같아요오?”

교태로운 목소리로 위스키 잔을 빙빙 돌리며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정신을 다 잡아야 했다.

지금 나는 취했다.
실수하지 마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실수했다.

“에-? 왜요? 우이는 남자친구 있으면 안돼요?”

어느새 우이씨는 자기를 삼인칭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아니요, 당연히 그런건 아니지만, 뭐랄까요 그게-“

앞에 한 말실수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주위의 무언가로 화제를 옮겨야 한다.

그래. 
위스키. 위스키 이야기를 하자.

“위스키..”
“에-?”

위스키 라고 말하자 우이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깜짝 놀라며 과장된 몸짓으로 뒤로 튀어나가는 그녀를 보고 내가 더 놀랐다.

“리-상. 지금 뭐라고 했어요?”
“네? ‘위스키ウイスキ’ 라고-“

우이씨는 내 말을 듣고 배시시 웃으며 물러섰던 몸을 앞으로 당겼다.
어째 처음보다 더 좁아져버린 둘 사이를 가로지르며 우이씨의 얼굴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우이스키ウイスキ? 우이스키 羽衣好き?”  

우이 좋아.

우이씨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장난을 치며 깔깔 웃었다.

아아.
아무래도 오늘 나는 더 큰 실수를 할지도 모르겠다.

위스키ウイスキ
우이스키ウイ好き

신주쿠 한켠의 작은 바 구석.
위스키도 우이도 둘다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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