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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단편집

처음이라는 말의 의미.

by 담쟁이저택 2023. 11. 9.

 

나는 처음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나는 그 처음, 또는 첫이라는 어감을 좋아하고.
처음에 기대어 따라오는 그 미지에 대한 기대를 좋아한다.
 
첫 입학.
첫 인상.
첫 사랑.
 
세상이 온통 처음 경험하는 것들로 가득했었던 때를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파도는 그 넘실거림이 재미있었고.
처음으로 입학한 학교는 하루하루 심심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내 첫 방학은 그렇게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나보다.
 
첫 연인과는 손만 잡아도 얼굴이 발갛게 익었었고, 
처음으로 한 입맞춤은 머리속이 멍해지는 연분홍 맛이었다.
 
그렇게 첫경험들로 가득찬 내 10대와 20대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알록달록 다채로운 시간들로 가득차 있었다.
 
오늘은 참 바쁜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해가 졌다.
 
분명히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는데, 난 오늘 어떠한 첫경험도 하지 못했다.
매일 걷는 길을 걸어, 자주 타는 버스를 타고, 늘 내리는 곳에 내려, 익숙한 건물안의 친숙한 자리에 앉아, 똑같은 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오늘의 나에게는 어떠한 처음도 없었다.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닐텐데, 갑자기 문득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제법 속상해졌다.
 
나는 어느새 나이를 먹은걸까.
이제 더 이상 옛날같은 총천연색의 경험은 할수 없는 걸까.
 
약간 비릿해져버린 입안을 애써 혀로 털어내고, 편의점에 들러 술과 안주를 샀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뭐 늘 그래왔듯 오늘은 실패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술자리를 펼친다.
소박한 과자와 소주가 오늘의 위문품이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소주병을 돌려 소용돌이를 만든다.
어디서 본건 있어서 팔꿈치로 소주병 바닥을 치고 첫잔을 뚜껑에 담아 버린다.
 
그렇게 첫잔이 아닌 첫잔을 소주잔에 따르고 입에 털어 넣는다.
 
크으-
입안에 퍼지는 이 감미료섞인 에탄올의 맛.
 
나는 처음을 좋아한다.
하지만 처음과 닮은 너는 싫다.
 
역시 소주는 참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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