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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단편집

재수없는날

by 담쟁이저택 2023. 6. 27.


염라대왕이 말했다.

“좋다, 그럼 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으로 되돌려 보내주마. 물론 그 시점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은 지울 것이기에 그냥 돌려보내 줘봐야 너는 똑같은 인생을 살테지, 그러니 그 후회되는 짓을 하지 않도록 무언가 장치를 해놓고 싶다면 그것 정도는 도와주도록 하마”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염라대왕님. 저, 정말로 이번에는 열심히 살겠습니다. 정말로 착하게 남들 도우면서-“

염라대왕은 소란을 피며 인생의 계획을 늘어놓는 망자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렸다.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지루했을 뿐.
그랬다. 염라대왕은 지루했다.

매일같이, 아니 정확히는 시간 축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이 세계에서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이 지루했기에 잠깐 장난을 쳐 보았을 뿐, 정말로 단지 그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그랬기에 그가 딱히 대단한 사연을 가진 망자도 아니었지만, 그저 지루함에 못이긴 그의 변덕에 눈 앞의 망자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그럼 말하라, 언제로 돌아갈 것인지, 무엇을 바꾸어놓을 것인지”

염라대왕의 심드렁한 목소리에도 망자는 전율을 느끼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망자의 이름은 최영국.
20대 초반,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성숙한 어른이 되지는 못했던 그 시기에 그는 남은 인생을 망쳐버린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하는 렌트카 업체에서 지금부터 두 시간 안에 오면 하루 동안 단돈 20만원에 람보로기니 우라칸을 빌려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에 눈이 멀어 전날 먹은 술이 다 깨지도 않은 와중에도 불알친구 병진과 함께 자기 똥차를 몰고 서울 성북구에서 경기도 하남시까지 미친듯이 달려 결국 그 조건을 맞추어 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억대 외제차를 몰아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단 1분 25초 동안.

처음으로 밟아보는 고출력 엔진 탓이었을까, 아니면 전날 먹은 술이 덜 깬 탓이었을까.
렌트카 회사에서 벗어나 코너를 돌자마자, 영국은 길가에 서 있던 어린 여자아이를 차로 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치어 죽여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차는 사고시에 반파.

사망자가 나온 교통사고, 반파된 억대 외제차. 그리고 또 무엇보다 전날 술이 덜 깬 탓에 나온 음주운전 판정.

그 순간을 기점으로 영국의 인생은 나락으로 곤두박질 쳤다.

수년간의 징역살이와, 온 집안을 쓸어버린 파산신청.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인생의 나락을 경험한 그는 단 한 순간도 그날의 실수를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가 그날 그 차만 빌리지 않았다면.
그 빌어먹을 외제차만 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망자는 말했다.

“제 인생에서 제일 재수없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제가 22살이었던 해.. 2018년 1월 21일.. 날자도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저를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염라대왕이 말한다.

“좋다. 그렇다면 바꾸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제 차의 네비게이션을 고장 내주십시오”

“뭐?”

영국이 한 의외의 말에 약간은 흥미가 생긴 염라대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는 심각한 길치입니다.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집 앞 마트까지 가는 길도 헷갈려요. 제 차 네비게이션만 고장 내주신다면 제가 그 차를 빌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피식-
그런 종류의 생각인가.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차를 고장 내는 편이 확실하지 않겠느냐?”

“그.. 그렇습니다만, 제가 저를 알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만약 차가 대놓고 고장이 난다면 저는 아마 택시를 타고서라도 갔을 겁니다. 그렇지만 네비게이션 정도라면 아마 어떻게던 운전해서 가보려다가 늦어서 실패했을 겁니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야기일까, 어떨까?
사실 뭐 어찌되었던 좋았다.

염라대왕에게는 정말로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잠깐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여흥일 뿐이었으니.

“좋다, 그렇게 하지. 너를 2018년 1월 21일로 돌려보내주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국은 다시 오뚝이마냥 엎어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큰절을 올리던 그는, 아무런 기억도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인간세상의 수십 년 후.
시간축이 인간세상과 어긋나 있는 저승에서는, 그저 어느 정도의 지루함이 지난 후.

여느 때와 같이 옥좌 위에서 망자의 대열을 바라보던 염라대왕은 영국이 망자의 사이에 섞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를 줄의 맨 앞으로 불렀다.

“오호라, 네놈은 낮이 익은 얼굴이구나”

“네? 저.. 저를 아시나요?”

영국은 반색하는 염라대왕의 목소리에 잔뜩 기가 죽었다.

“내게 간청하여 네놈 인생에서 제일 재수없는 날로 돌아가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한 놈. 그래 이번 인생은 좀 어떠하였느냐?”

“네, 죄송합니다만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은 완전 시궁창이었는데 뭔가 사람을 잘못보신 건 아니신지..”

“뭐?”

염라대왕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감히 한낱 망자주제에 염라대왕을 의심하다니.

그렇지만 기억이 지워진 영국으로써는 사실 자신이 두 번째 기회를 얻었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다.

그 사실을 아는 염라대왕이기에 그는 이번은 그냥 참고 넘어가주기로 했다.

“네 놈이 알 길은 없을 테지만 난 한번 네놈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었다. 2018년 1월 21일에 자동차 네비게이션을 고장 내달라는 네놈의 부탁도 들어주었다. 근데 무슨 인생을 어떻게 살았기에 또 시궁창이 되었다는 것이냐?”

“어? 그 날을 아십니까? 그날, 그날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재수없었던 그날”

영국은 설명을 시작했다.
영국은 너무나도 좋은 조건으로 억대 외제차를 빌릴 수 있다는 말에 불알친구 병진과 함께 경기도 하남시로 향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전날까지 전혀 문제가 없던 네비게이션은 먹통이었고, 그 바람에 옆에 앉은 병진은 운전하는 내내 자신의 핸드폰 지도앱으로 네비게이션을 대체해야 했다.

네비게이션 없이 익숙치 않은 길을 가는 영국과, 핸드폰 지도앱에 익숙치 않았던 병진의 조합으로 중간중간 길을 헤맸던 그 둘은 간신히 약속된 2시간을 넘기지 않고 렌트카 업체에 도착을 했고 또 간신히 차를 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차를 운전한 몇 시간 뒤.
익숙하지 않은 고출력을 차를 몰았던 영국은 결국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람보르기니는 엔진까지 손상이 되었고, 보험회사는 영국의 혈중알콜농도가 0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보험집행을 거부했다.

덕분에 진 억대의 빚에, 부모의 재산을 다 털어먹고도 결국 파산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의 인생은 죽을 때까지 지난번의 생처럼 여전히 밑바닥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기껏 기회를 주었더니 별반 다를 것도 없었던 인생이라니”

뭘 해봐야 역시나 밋밋하고 지루할 따름. 염라대왕은 혀를 찼다.

쯧쯧거리며 고개를 젓는 염라대왕을 보며, 영국은 죽을 각오로, 아니 이미 죽었기에 두 번 죽을 각오로 염라대왕 앞에 무릎을 꿇으며 청했다.

“감히 주신 기회를 날려버려 죄송합니다. 그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해 더더욱 죄송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만약 정말로 괜찮으시다면, 그게 가능만 하다면 저를 그날로 한번만 더 돌려보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돌한 영국의 반응에 지루했던 염라대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번에 한번만 더 돌려보내주신다면, 정말로 잘 살아보겠습니다. 정말로 착하게 살아보겠습니다”

피식-
염라대왕이 웃었다.

뭐 좋다.
어차피 하는 여흥.

한 번이던 두 번이던 사실 그에게는 전혀 차이가 없다.

“좋다, 다시 돌려보내주마. 지난번에 네비게이션을 고장 낸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니, 이번에도 무언가 하나 더 청해보도록 해라”

“그..그렇다면”

영국은 잠시 생각을 한 뒤 청한다.

“네비게이션과 더불어 친구 병진이 놈의 핸드폰도 좀 고장을 내 주십시오. 저는 핸드폰 네비게이션 만으로는 도무지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만약 병진이 놈만 없었다면 제가 그 날 그 차를 빌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좋다, 그렇게 하지. 그럼 너를 다시 2018년 1월 21일로 돌려보내주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본인은 기억 못하겠지만, 지난번 기회를 얻었었던 때 마냥 영국은 다시 오뚝이마냥 엎어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다시 인생에서 가장 재수없었던 날로 돌아갔다.

 

 

 

 

 

 

 

 

“아, 병진이 이 새끼는 왜 대체 전화를 안받고 지랄이야”

영국은 거칠게 핸드폰을 침대에 집어 던졌다.

인생 일대의 기회.

푼돈으로 슈퍼카를 몰아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
평생을 기다려봐야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얻은 영국은 가장 친한 친구 병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자동응답 메시지였다.

“어제 술 쳐먹고 핸드폰 충전 안하고 뻗어버린 거 아니야 이 새끼”

영국은 전날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셨던 병진이 비틀거렸던 모습을 기억해낸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나 혼자라도 출발하자”

전날 마신 술의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억누르며, 영국은 일단 차 키를 챙겼다.

으흐흐, 병진이 놈, 내가 슈퍼카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 표정, 놓치지 말고 제대로 사진 찍어다가 인스타에 올려야지.
아 오늘 그럼 그 차 가지고 뭐하지? 헌팅이라도 할까? 인기 쩔텐데.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주차장으로 내려와 자신의 20년된 소형차에 시동을 건 영국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미친 뭐야 이거, 네비는 왜 또 먹통이야?”

너무나 구형인 영국의 차는 내장 네비가 없었다.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 중고나라에서 2년전 구입한 네비게이션.

네비는 배터리가 나간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냥 완전히 고장이 났는지 전혀 켜질 기색이 없었고 영국은 그저 짜증만 날 뿐이었다.

“아, 빌어먹을 오늘은 진짜 뭐 되는 일이 없네. 병진이 이 새끼가 전화만 받았어도 옆에서 길안내라도 시키지”

영국은 투덜거리며 핸드폰 자체 네비를 틀어 사이드 브레이크 앞의 공간에 기울여 내려놓는다.

길치인 영국이 네비게이션도 없이 서울에서 하남까지 제대로 운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운전을 잘하는 것도 아닌 그가 운전 중에 한눈을 팔아 핸드폰을 주물럭 거릴 수도 없다.

그러니 이제 믿는 것은 핸드폰 네비게이션이 불러주는 음성 안내.
몇백 미터 후 좌회전, 우회전 메시지를 믿고, 가끔씩 정차했을 때 디스플레이를 확인할 계획을 세운 영국은 일단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기를 어느새 한 시간 반.
영국은 지금 매우 짜증이 나 있었다.

“아 진짜, 아 진짜 빌어먹을 아아아아악!”
영국은 자동차 핸들을 잡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며 분노를 표시했다.

흘깃 바라본 핸드폰 디스플레이에 보이는 목적지까지의 도착예정시간은 약 40분.
톨게이트에 접어들기 전 네비게이션 음성 메세지를 잘못 알아듣고 길을 한번 잘못 꺾은 탓에 영국은 지금 다시 톨게이트로 재진입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한번 꼬인 행로는 쉽게 다시 풀리지 않았다.
긴장하고 당황한 탓이었을까, 영국은 재차 다른 작은 실수들을 하여 길을 헤맸고 이미 꽤나 많은 시간을 날린 상태였다.

지금 상태로는 최단거리로 달려도 약속된 제한 시간을 맞추기 힘든 상황.

50미터앞 좌회전이라는 말을 듣고, 좌우 차선을 살핀 뒤 맨 왼쪽차선으로 자리를 바꾼 영국은 네비게이션의 ‘경로를 재 탐색합니다’라는 말에 이윽고 차 안에서 괴성을 질렀다.

“경로를 재설정했습니다. 목적지까지의 예상 도착시간은 1시간 13분입니다”

“아아아악! 짜증나! 빌어먹을! 됐어! 텄어! 집에나 갈래!”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대며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핸드폰을 쥔 영국은 목적지를 집으로 바꾼 뒤 거칠게 원래 자리로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아 진짜 재수없어! 뭐 진짜 이런 재수없는 날이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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