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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단편집

여기는 알래스카, 신혼여행중에 조난을 당했다

by 담쟁이저택 2023. 6. 18.

 

지익- 지익-

고체연료를 태워 굽고 있는 곰 내장에서 불쾌한 소리가 난다.

 

..지금이 도무지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평생을 산악인으로 살아왔지만, 이런 위기를 처음 겪어본 것도 아니지만, 이번에 드는 공포감은 예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결혼을 한 몸이니까..

 

..그리고 같은 산악인 출신인 아내가, 지금 내 옆에 없으니까.

 

아내와는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하는 프로젝트 팀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씩씩하고 든든한 모습에서 느껴진 의외의 매력에, 등정을 시작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 홀딱 반해버렸었지..

 

장비와 물자의 부족으로 결국 도전은 실패했지만, 귀국길에 미친 척 질러버린 고백에 배시시 웃었던 아내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빌어먹을.

이 미친 신혼여행은 내 생각이었다.

 

산을 타다 만난 사이고, 또 평생을 산에 도전하며 살 우리니까, 신혼여행은 알래스카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 이름도 유명한 디날리 산.

정상까지는 못 가보더라도, 우리 최선을 다해서 올라가서 우리 둘 이름이 새긴 깃발을 꽂아놓고 오자고.

 

...

 

그렇게 신혼여행인지 신혼여정인지 모를 등반을 시작하고, 첫번째, 두번째 캠프를 세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등반은 순조로웠고 날씨도 우리 편이였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사흘 전..

조금 가파른 빙벽을 오르던 중 갑자기 불어온 돌풍에 아래쪽에서 따라오던 아내가 빙벽대신 우리 둘 사이 연결된 자일을 찍어버렸다.

 

곡괭이 질 한두 번에 끊어질 자일이 아니지만, 그 빌어먹을 돌풍은 계속해서 우리 둘을 흔들어댔고, 결국 우리 둘을 이은 자일은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줄은 끊어졌지만 그녀는 떨어지지 않았다. 높이도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빙벽에 박아 넣은 쐐기가 그다지 멀지 않은 탓에.

 

그녀와 나는 간신히 얼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떨어졌지만, 둘 다 아무 곳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려가는 줄을 잃어 내려갈 수가 없고, 그녀도 내 위치까지 올라오기에는 자일의 길이가 부족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

두 번째 캠프로 돌아가서 만나자.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마치고 그렇게 나는 위로, 그녀는 아래로 향했다.

빙벽을 다 올라간 뒤, 약간의 재정비를 마치고 나는 두 번째 캠프로 돌아가는 길을 향했다.

 

돌아오는 길은 약 하루 반의 여정.

거의 대부분의 생존물품을 아내 쪽에 맡겼기에 나는 꽤나 서둘러서 내려와야만 했다.

 

반대로 말하면 아내 쪽은 조금 여유가 있을 테니.. 라고 안심하며 내려온 두 번째 캠프.

 

그곳에 아내는 없었다. 그리고 설상 가상, 보관해 놨던 비상식량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도난 당해 있었다.

 

..

 

산악인들 사이에 중간중간 세워놓은 다른 등반 팀의 캠프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캠프를 훼손해버려서 돌아와도 어찌할 도리도 없게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 경우는 식량만 가져갔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가지고 있던 식량에, 아내가 가지고 있을 식량, 둘을 합치고 나면 1번 캠프로 돌아갈 정도는 될 테고, 만약 거기마저도 이렇게 도난을 당했다면?

 

아마 등반은 포기해야 되겠지.

 

아무튼 지금 걱정거리는 그런 게 아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그녀가 걱정이지.

 

분명히 거리상으로는 나보다 짧았으니 먼저 도착을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날씨가 워낙에 험했으니,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하느라 조금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나 싶어 하루를 꼬박 날을 새고 기다린 게 어제 새벽.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반가워 나가보니 기다리던 아내를 대신해서 내 키보다 더 큰 야생 곰이 서 있었다.

비상용으로 챙겨온 사냥용 라이플이 캠프에 없었으면 난 정말로 이 녀석의 밥이 되었겠지.

 

미친 듯이 총알을 쏴대는 터라 가져온 총알을 거의 다 써버리고 말았지만, 어찌저찌 곰은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식량도 대체 할 겸, 상대적으로 손질하기 쉬운 부위인 뱃살과 내장을 들어내어 캠핑장 뒤에 묻어놨다.

 

그리고 남은 곰 시체는 토막 내서 절벽 밑으로 던져버렸다.

이렇게 야생동물들이 나오는 곳에 필요이상의 고기를 나둬 봐야, 다른 동물들의 표적이 될 뿐이니까.

 

이런 때는 푸줏간을 하셨던 아버지에게 감사를 해야 하나.

집안일이라며, 이게 니가 먹는 밥값이라며 강제로 시키셨을 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일도, 막상 필요할 때는 도움이 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장이 노릇노릇하게 익었다.

식량도 식량이지만 신체 보온을 위해서라도 고체연료도 최대한 아껴야 한다.

 

서둘러 불을 끄고 잘 익은 내장을 입에 넣는다.

간도, 양념도 아무것도 되지 않은 기름덩어리 내장이 맛이 있을 리는 없지만 천천히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한다.

 

이런걸 씹을 때는 정말 천천히 씹어야 한다.

이런 산 한가운데에서 배탈이라도 나면 정말 대책이 없으니까.

 

'딱'

 

악! 빌어먹을!

무언가 딱딱한걸 씹어버렸다.

 

이런 젠장, 내장에 총알이라도 박혀있었나.

 

꼭꼭 씹어먹으려고 힘주어 씹은 이빨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진다.

 

'퉷'

 

아니 도대체, 이놈의 곰 새끼는 죽어서도 얌전하지가..

 

..

 

뭐야. 이거.

이게.. 왜 여기에.

 

손바닥 위에 뱉어낸 총알.

아니, 총알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왜 내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것과 꼭 닮은 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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