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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단편4

식탁예절 종편에서 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아침 방송. 현란한 그렇지만 요란하지는 않은 관악기들의 연주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주부들 사이에서는 육아에 관련해서 유용한 정보로 화제가 되고 있는 방송. 생방송 ‘우리 아이 바르게 키우기’ 의 막이 올랐다. 오프닝 음악이 사그라 들어갈 때 즈음 이어져 터져 나오는 방청객들의 호응. 그에 맞춰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가 사그라들어 갈 때 즈음, 무대에 등장한 중년의 여성 패널이 공손히 인사하며 손에 쥔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댄다. "반갑습니다. 어머님들. 일주일 만에 뵙는데 어째 지난 주보다 더 젊어지신것 같아요?" 패널의 농담에 까르르- 하는 웃는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방청객들의 반응을 확인한 여성 패널, 올해로 마흔 네 살을 맞은 박해영 아나운서는 .. 2023. 7. 28.
VR 덜덜덜..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에 숨은 채, 문틈 사이로 밖을 살피는 문후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숨어 있는 곳은 그가 평소에 그렇게나 열렬히 좋아하던 유명 게임방송 여 BJ 단비의 집 장롱 안. 그리고 그가 지금 이 안에 숨어있는 이유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아무리 봐도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무섭게 생긴 2인조가 지금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따, 우리 약쟁이씨는 또 어데 쳐박혀서 뻗어있노, 오늘 수금날인거 까먹은거 아이가? 참말로 어디 가고 없는가, 행님, 어쩔까요?” “어쩌긴 뭐 어째, 큰형님 말씀 하신 대로 해야지. 이 년도 처음에나 좀 돈이 되나 싶었더니, 이제는 약을 너무 많이 쳐 먹어놔서 오히려 적자야. 오늘 수금 안되면 섬으.. 2023. 7. 3.
재수없는날 염라대왕이 말했다. “좋다, 그럼 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으로 되돌려 보내주마. 물론 그 시점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은 지울 것이기에 그냥 돌려보내 줘봐야 너는 똑같은 인생을 살테지, 그러니 그 후회되는 짓을 하지 않도록 무언가 장치를 해놓고 싶다면 그것 정도는 도와주도록 하마”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염라대왕님. 저, 정말로 이번에는 열심히 살겠습니다. 정말로 착하게 남들 도우면서-“ 염라대왕은 소란을 피며 인생의 계획을 늘어놓는 망자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렸다.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지루했을 뿐. 그랬다. 염라대왕은 지루했다. 매일같이, 아니 정확히는 시간 축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이 세계에서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이 지루했기에 잠깐 장난을 쳐 보았을 뿐,.. 2023. 6. 27.
투표 “하아,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한다” 혀를 쯧쯧 차며 손에 든 명부를 이리 저리 돌리는 이 검은 옷, 검은 갓의 남자의 직업은 저승차사. 올해로 저승차사 829년차에 접어들은 해원맥은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이란 다름 아닌, 명부에 적힌 망자들의 사망 시각과 실제로 망자가 죽은 시간이 차이가 났기 때문, 보통 이런 경우는 명계에 보관된 필사본, 일종의 백업본과 같은 느낌의 서류를 뒤져서 시간을 대조해보기 마련인데, 이번에 문제는 명계에 보관이 되어 있어야 할 일종의 필사본이 소실이 되어버려 원맥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지금 차사의 눈앞에 선 망자는 셋. 차이가 나는 시간은 대략 30분. 원맥은 과연 이 셋 중 누구의 시간이 실제와 다른지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는 상태였다. 만약에 이 30분이 망.. 2023. 6. 23.